<엄마표 음료수/호박 달인 물>
날이 참 좋다. 봄을 느끼기에는 너무 추웠고, 지금은 덥다.
요즘은 겨울에서 바로 여름으로 가는 것 같다.
오늘은 월말이라 오전내내 은행이체와 각종 고지서 납부 및
결산으로 인해 바빴다. 업무상 3월은 시작이 아니라 결말<결산>이다.
10년 넘게 해오는 일이라 작년과 크게 다름은 없지만
어제 등기로 배달된 서류로 한동안 골머리를
앓을 것 같다. 소명자료.....이런 것 딱 질색이다.
"점심 식사 뭐 드실래요?"
11시 40분이 되면 어김없이 물어오는 후배동료의 약간 짜증섞인 말...
맨날 물어보는 동료 말에 시원하게 나 뭐 먹을라요, 하는 사람 한사람도 없다.
오늘은 또 뭘로 끼니를 때워야 하나, 그런 표정들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잠시 업무에서 벗어나 밖에 나가 밥을 먹고 싶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는지 결국 사무실로 중국음식을 배달시켜 먹는단다.
"나는 나가 먹으려니 내 것 빼고 시키시오~"
혼자라도 어디가서 중국음식이 아닌 다른 뭔가를 먹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회사 사무실과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살고 계시는 친정엄마가
오늘 잠시 들려서 호박 달인 물을 가져가서 먹으라는 전화를 아침에 주셨다.
옳거니, 엄마집에 가서 점심 먹으면 되겠다, 싶었다.
"엄마, 나 지금 회사에서 출발할테니, 점심 좀 주시오."
뜬금없이 전화해서 점심 주라는 큰딸의 말에 엄마는 반갑고 좋으면서
뭘 준비해서 줘야 하나, 걱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은행 일도 봐야하고 모처럼 엄마랑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엄마집에
가는 마음이 봄날보다 따뜻하다. 10 여분 운전하니 엄마집에 도착했다.
혼자 살고 계시는 엄마집은 늘 이웃 사촌 이모들과 서너분씩 함께 계신다.
다행히 오늘은 같은 아파트 6층에 살고 계시는 <6층 할머니>만 계셨다.
"이모~ 잘 계셨어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엄마집 현관문을 들어서며 큰소리로 인사를 드렸다.
팔십 이모와 칠십 엄마는 TV 드라마에 푹 빠져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TV 소리는 얼마나 큰지 집에 들어가자 마자 소리를 일방적으로 확 줄였다.
<정성이 들어간 몸에 좋은 음료수>
엄마는 늘 시간에 쫓진 딸이 얼른 먹고 가라며 이미 점심상을 차려 놓으셨다.
김치 몇 가지와 막 씻은 상추와 된장과 <미역만 들어간 미역국>이였다.
이모는 늦게 아침식사를 하셨다고 드시지 않기에 사들고 간 오렌지를 까서 드렸더니, 맛나게 드신다.
엄마랑 나는 아주 모처럼 점심을 먹는데.....평일 이런 점심은 처음인 것 같다. ㅋㅋ
상추에 된장만 넣어서 먹는데...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엄마, 진짜 맛있다."
나는 미역국에 소고기도 넣고, 굴도 넣어보고 바지락도 넣어서 끓여봤지만
해산물이나 고기를 넣지 않아도 이렇게 맛있게 미역국을 끓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음식솜씨가 좋다는 얘기다.
밥 한그릇을 뚝딱 비우고 20분 정도 얘기를 나누는데...이 두 분은 온 정신이
TV 드라마에 집중되어 있다. 무슨 드라마인지 조회를 해보니<동해야 웃어라> 이다.
어, 이것 저녁에 하는 프로잖아요. 물어보니 이 시간에 일주일 분량 것을 재방해준단다.
"엄마, 어제 저녁에 이 드라마 안 보셨어요?"
"봤는데, 또 보는 거야."
두분은 주거니받거니 TV 드라마를 겨냥해 서로 대화를 하신다.
드라마 속 내용이 현실인양 악역을 담당한 자에게 욕도 서스름없이 해대고....ㅋㅋ
어쩜 저럴수 있냐,며 나한테 얘기도 해주시는데, 내가 드라마를 알아야지 응수를 해드리지...
혼자 적적하게 계시지 않고 늘 동네 이모들과 함께 사랑방꽃을 피우는 엄마집이 학창시절에는
싫었는데, 지금은 감사하다. 혼자 외롭게 점심을 드시지 않고 적어도 서너명의 이모들이
엄마집에서 모여 점심을 드시니....참 좋다.
싫어하는 중국음식을 어쩔수 없이 억지로 먹지 않아서 다행이다.
요란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이 들어간 엄마표 점심을 먹게 되어서
오후 업무는 그런대로 즐겁게 할 것 같다.
호박 달인 물을 세병씩이나 바리바리 싸주신 엄마가 계셔서 정말로 감사하다.
오래오래 항상 그 자리에 언제까지나 계셨으면 좋겠다.
2011.03.31. 오후 3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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