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산 2011. 5. 12. 15:54
 

<제가 담은 김치 아닙니다. ㅋㅋ    시어머니가 담근 김장김치입니다>

 

결혼 후 줄곧 맞벌이를 하다 보니 김치를 담글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친정 어머니와 가깝게 살고 있는 덕분에 어머니가  김치를 담가주시면 그저 고맙게 받아 먹었을 뿐이다.그래도 주부랍시고 언젠가 요리책을 보며 큰맘 먹고 나박김치를 담근 적이 있었다. 무와 배추는 나박나박 썰고 당근과 대파는 길이에 맞춰 썰고 난 후 물에 고춧가루를 넣어 색깔을 발갛게 물들인후 찹쌀물이 없는 관계로 밀가루를 알맞게 풀어 김치통에 담아 놓았다. 물김치는 숙성을 잘해야 깊은 맛이 난다기에 담근 지 3일후에 들뜬 마음으로 개봉을 했다.

 

저녁 식사 시간, 물김치를 예쁜 그릇에 담아 내놓으며 콧소리까지 섞어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 , 깊은 맛은 없지만 정성을 생각해서 맛있게 먹어줘”.

그러자 남편은 조금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김치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더니 “깊은 맛은 고사하고 얕은 맛도 안 난다”. 설마 그럴까 싶어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먹어본 그날 이후로 김치 담그는 것을 포기했다. 무 따로 배추 따로 국물맛 따로 모든 재료가 어울림은 없이 제각각 따로 맛을 내고 있었다. 그후 자격지심에 헤어나지 못하고 줄곧 친정 어머니께 김치를 얻어 먹거나 가게에서 사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전 다시 김치를 담그겠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어릴적 어머니의 음심솜씨는 동네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일품이셨다. 그런데 환갑이 지난 후로는 김치맛이 짜고 맵고 쓰고 달아서 영 맛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해서 어쩔수 없이 먹고는 있지만 어머니의 연로하신 모습처럼 김치맛도 이제 빛을 잃게 된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어머니는 김치 담아 자식들 주는 재미에 사시는데 또한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하시는데 이제는 맛있다는 거짓말 하기도 지친 것이다. 또한 가게에서 사먹는 김치는 하루가 지나면 맛이 변해 시금털털하게 변해버리는 것이다.


나박김치 실패작의 원인을 분석하고 할 수 있다는 자기암시를 되새기며 대모험을 강행하게 되었다. 사실 김치다운 김치를 담가보지 못한 나에겐 김치 한 번 담그는 일이 김장김치를 담그는 연례행사처럼 힘들고 어렵게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요리관련 사이트를 검색해보고, 집에 있는 요리책을 여러번 정독한 후 어떻게 하면 깊은 맛이 나는 김치를 담글수 있는지 종이에 써 가며 공부를 한 것이다. 공부하고 있었던 내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다. 결코 김치는 이론으로 담그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은 실기인데... 손 없는 일요일, 동네 슈퍼마켓에서 배추, 무, 미나리, 당근, 양파, 고추를 샀다. 남편은 베란다에서 네포기의 배추를 소금에 절인후 씻어서 바구니에 건져 놓느라 허리를 펴지 못한 것 같고 나는 장장 세시간 동안 배추 김치에 들어갈 부재료를 다듬고 씻고 썰었다. 그 다음으로는 김치를 버무릴 양념을 만들어야 했는데 여기서부터 초보자의 티가 여실히 드러났다. 고추에 마늘, 생강, 밥을 넣어 갈아야 하는데, 밥솥에는 잡곡밥이 턱 하니 있는 것이다. 부랴부랴 하얀 밥을 따로 준비해야 했다.

 

이재저래 헤매고 주방이 난장판이 되어갈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때마침 친정어머니가 오셨다. 천군만마를 얻는 듯 나는 뒤로 한발짝 물러서서 어머니의 충실한 보조 역할을 자초했다. 화려한 요리책을 여러번 보며 책대로 잘 하려고 했으나 30년 이상 김치를 담그신 어머니의 손놀림 앞에는 새발의 피였다. 실습 나온 착한 견습생처럼 어머니의 숙달된 솜씨로 김치 버무리는 것을 눈으로 꼼꼼히 보며 익혔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와 남편과 나의 합작으로 완성된 김치는 묘한 맛이 어우러져 있었다. 풋내기 견습생의 화려한 빛깔과 도전. 노력. 용기라는 맛과 친정어머님의 김치의 진정한 맛인 깊은맛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입맛에 꼭 맞는 김치 하나 있으면 열반찬 부럽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밑반찬을 여러개 해놓고 남편의 칭찬을 듣고자 했던 나에게 되려 남편은 얼큰하고 시원한 찌개 하나 있으면 된다는 말에 속상했던 신혼 새내기의 모습이 미소를 짓게 한다. 무더위로 식욕을 잃게 되는 요즘 어릴적 끈달린 바구니에 보리밥 담아 바람에 살랑살랑 식혀지면 보리밥 물에 말아 토실토실 풋고추 집된장에 찍어 먹으면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 옛날로 돌아가 입맛을 찾아볼까나...

 

 


10년도 지난 것 같은데 월간잡지 <샘터>에 실린 글이다.

이번 <김밤 옆구리 터진 이야기>를 읽으면서 김치 담그기에 도전한 이 글이 떠올라 다시 올려본다.

확실히 나는 요리하고는 좀 먼 상태였구나...ㅋㅋ

그러나 뭔가 해보려는 노력정신은 좀 투철하다. ㅎㅎ

아마 이 글을 써놓지 않았다면 그날의 생생한 장면들이 없었을텐데...

10년도 지났어도 그날의 일이 어제일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 기록하지 않는 날은 죽은 날이라는 말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