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산 2005. 12. 24. 10:45

이사(移徙)


8년 된 아파트로 이사를 온 지 보름 정도 되어간다. 신축된 아파트에서 5년 정도 살다가 왔으니 헌 집으로 온 셈이다. 헌 집이지만 아파트가 복도식이 아니라 계단식이고 평수도 네 평 정도 넓은 집이다. 우리집은 결벽증에 가깝도록 깔끔한 남편이 청소를 담당한다. 남편은 청소 중독자이다. 청소를 하지 않으면 숨쉬기도 곤란하다며 밥도 먹지 않는다. 그러니 남편이 살기 위해서는 손수 청소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출근 전에 매일 거실이며 방을 쓸고 닦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집이 아주 깨끗하고 그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이사 당일 가재도구를 드러낸 자리에는 튼실한 먼지 뭉텅이가 수도 없이 많이 나왔다. 그것들도 한곳에 뭉쳐 자리 잡고 산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5년 동안 같이 산 것을 생각하니 그 먼지들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아니 그 놈들로 인해 깨끗한 척하며 살았던 우리의 이중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세월만큼 쌓이는 더께 앞에 성실한 남편의 청소도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진 셈이다. 치부를 보여준 듯 쌓인 먼지만큼 부끄러웠다.

 

복도를 축으로 아홉 집이 닭장마냥 붙어 있을 때에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몰랐다. 맞벌이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적다보니 옆집에 사는 이웃과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5년을 살았다. 천 세대가 살 정도로 많은 이웃이 살았지만 이웃다운 이웃이 없었다. 달랑 우리가족만 부대끼며 우물안 개구리처럼 산 것이다. 이사를 가더라도 나를 볼 수 없어 서운할 그 누구도 없었을 것이고 누군가를 볼 수 없어 슬프다는 감정 또한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이런게 아파트의 삶일까. 이삿집을 다 챙기고 마지막 현관문을 나설때 괜스레 내 뒷 모습이 민망했다. 처음 인사가 없었기에 안면은 있는데도 엘리베이터를 타면 본체만체 죄 없는 층수 버튼만 뚫어져라 쳐다본 나였다. 먼저 통성명을 했다고해서 자존심 상한 일도 아니였을텐데 굳게 입을 닫아버린 나였다. 모든게 내 탓이다.

 

12년의 살림살이는 유행에 한참 뒤떨어져 볼품없고 그 튼실했던 가구들도 나이를 먹은 태가 여실히 나타났다. 장롱은 이불과 옷으로 눌리고 책장은 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랫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가서 수평이 깨지니 이음새가 벌어지고 너덜너덜해졌다. 사람이야 아프면 약도 먹고 치료도 할 수 있는데 움직이지 못하는 가구들의 기구한 운명을 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이삿짐이 자리를 잡아가자 외출나갔다 들어온 듯 1101호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건낸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사 오셨어요. 반가워요. 제가 도와드릴 일 있을까요?”

“아, 예~ 반갑습니다.”

나이는 쉰 정도 되어 보이는 앞집 아주머니의 인사를 통해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는  마음을 대번에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점심은 먹었느냐며 자기집에서 식사하라는 것이다. 혹시 텃세는 부리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좋은 이웃을 만난 것 같아 다행이다. 예전에는 이웃을 소 닭 쳐다보듯 했는데 이제부터는 미소로 반겨야 될 것 같고 웃음꽃 활짝 필 날이 많을 것 같다.  

 

저녁식사를 하려고 막 준비를 하는데 앞 집에서 김치 한 통을 가지고 오셨다. 먹음직스러운 나박김치는 금방 담근 김치였다. 친절하게 지금 먹는 것보다 좀 익혀 서 먹으면 더 맛있다는 말까지 하고 가셨다. 김치를 사서 먹는 나에게 김치만한 좋은 선물도 없다. 맛난 김치를 먹으며 그 통에 무엇을 담아서 드려야 보답이 될까,  생각해 봐도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삼일 뒤 나는 크고 튼실한 단감을 김치통에 가득 담고 집들이 떡을 두 개 담아 드렸다. 비오는 날 부침개를 들고 콧노래 부르며 이웃집에 나르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파트 윗층 아래층 경비실에 떡을 돌리며 “안녕하세요 1102호에 이사 온 사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앞으로 우리집과 앞집 그리고 윗층 아래층 여섯 집이 모여 한 여름밤에 삼겹살 파티를 하겠다. 국가대표팀 축구경기가 있으면 여럿이 모여 2002년 월드컵 분위기도 내며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 응원도 하고 근린공원에 모여 배드민턴 대회도 갖고 뒷산도 함께 올라가야겠다. 아침 출근길 누구라도 먼저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할 수 있는 그런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먼저 밝은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낼 것이다. 받기 전에 베풀 수 있는 여유도 부리고 자꾸 퍼내야 맑은 샘물이 솟듯이 내 안의 있는 것도 이웃과 함께 나눠야겠다. 이번 이사는 단순하게 세간과 몸만 간 것이 아니다. 오로지 나만 챙기는 이기심과  깊은 맛의 인간미가 결여된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나도 멀리 이사를 보냈다. 이웃에 열린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는 살기 좋은 우리마을을 만드는데 앞장서야겠다. 아마 더불어 사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