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에 책을 받아 놓고, 일상의 분주함으로 가을이 되어서야 이 책을 다 읽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왜 책 제목이 기억과 몽상인지 알 것 같다. 61년생 박철수씨의 기억 속의 삶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사회 전반에 내재한 폭력으로 여실히 보여준다. 박철수씨의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고 또렷하게 남은 폭력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더 이상 폭력은 사라져야 된다,는 결의 같은 책이라 생각한다.
그 시절은 거의 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삼형제 중에 막내이지만 어머니를 모시면서 형제들 간의 애증도 있었을 것이다. 군대에서는 무차별한 구타 속에 성인 남자의 몸무게가 45kg까지 갔다는 것에 가슴이 쓰라렸다. 이런 후진국적인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아들을 군대에 보냈던 엄마로서 우리나라의 열악한 군대시스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무거운 짐진 자에게 영혼의 쉼터가 될 종교까지 그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들여다 보니 역겹기까지 했다.
그리고 20년 동안 굴지의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그 곳에서도 벌어지는 직원들 간의 언어 폭력을 비롯하여 상하 계급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 소비자가 직원에게 휘두르는 폭력과 직원이 하청업체에 갑질하는 폭력 등 말할 수 없는 세태를 말하고 있다. 철수씨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나또한 건설회사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갑질의 수모와 고초 속에 아픈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폭력에는 성역이 없다,라는 말이 맞다.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이 직장 여성들의 공포와 피로, 당황, 좌절, 놀람을 대변한 책이라 한동안 이슈가 크게 되었다. 수많은 김지영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서로 내 이야기,라고 공감의 눈물을 흘렸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여자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이 괜히 밉기까지 했다. 이 책이 여자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면 남자의 대변인 역할을 한 책이 윤 혁의 『기억과 몽상』 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직장 남성들의 고달픈 삶의 보고서이다. 남자들이 읽으면 서로 공감하며 위로가 될 책이다. 남자들의 이야기이니까. 또한 여성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좀 더 내 아들, 내 남편에 대해서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폭력에 시달리며 어떻게 살아 왔는지 그 폭력 속에 무차별하게 당하며 인생의 쓴 웃음을 짓게 만든다.
‘직장인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하고, 기억 속에 남은 좋은 상사, 훌륭한 선배로 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철수씨. 직장 후배들에게 좋은 모습을 남기고자 잘못된 것을 시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계란으로 거대한 바위치기였다. 회사가 직원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철수씨는 40대 중반에 강제 퇴직을 당하게 된다. 세상은 옳은 것이 좋아야 하는데, 여전히 좋은 것이 좋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의로운 철수씨의 앞날에 인생의 봄꽃이 활짝 피어나길 기도한다.
“삶이란 내 의지와 관계없이, 현재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미리 정해진 것인가? 아니면 내가 노력하면 바뀌는 걸까? 지금 꾸는 이 희한한 꿈이 현실인가, 아니면 깨어나서 맞이한 서글픈 현실이 꿈인가. 그렇다면 언덕 위 행복의 나라는 어디인가?”<p283> 소설 제일 마지막에 나온 이 글이 나에게 묻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을 대면할 때 좌절하게 된다. 흙수저들의 삶이 그러하리라. 한국에서 남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거쳐야 할 쓰라린 관문들이 많은지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가장의 무게에 억눌러 있는 50대 남편에게 이 책을 건내며 깊게 포옹해 줄 것이다.
철수씨의 기억은 상처 투성이다. 졸피뎀에 의존해 잠을 청해야 하는 철수씨가 한낱 깨어나면 없어질 꿈이라도 행복한 순간을 많이 접하길 독자로서 응원한다. 지금까지 잘 견디며 살아온 철수씨한테 꼭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