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물건』 이라는 김정운 저자의 책을 읽었다. 남자의 물건이라고 얘기하면 먼저 음흉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남자의 물건은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물 이야기다. 본인을 포함하여 13명의 남자들에게 두드러진 특색을 갖고 있는 그 무엇의 이야기다. 조영남의 트레이드 마크인 네모난 안경이 여기에 속한다.
저자는 12명의 명사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고이 간직하며 애용하고 있는 그 사물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사물에는 그들의 인생이 듬뿍 담겨 있다. 그러니 그 사물의 이야기만 읽어도 그들의 짧은 자서전을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물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 이 책은 저자가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 책이다. 독일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명사들의 심리를 특유의 가벼운 터칭으로 쉽게 표현하고 있다.
김정운의 책은 늘 챙겨서 보곤 한다. 저자의 책을 읽다보면 재미 있어서 몇 번 웃게 된다. 고리타분하지 않고 딱딱하지 않는 김정운 스타일의 책이 나는 좋다. 그리고 거침없이 얘기하는 그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남의 체면을 따지지 않고 거룩함하고는 거리가 멀다. 날것 그대로 싱싱한 표현이 마음에 든다. 시원시원한 글맛에 끌리는 것은 정작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너무 점잖은 나머지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어렵게 뱅뱅 돌려서 말하는 스타일이 딱 질색이다. 이와 반대인 김정운 스타일의 글쓰기가 나는 좋다. 독자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낸 책은 인기가 있다. 이 책은 남편에게 먼저 읽어보라고 건넨 책이다. 남편은 김정운과 동갑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 동시대를 살아온 작가의 생각에 많은 공감을 느낀 남편도 이 저자의 팬이 되었다.
책 뒤표지에 12명의 명사들의 사물이 목차처럼 나온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작가 박범신의 목각 수납통을 먼저 읽었다. 그 다음으로 안성기의 스케치북과 김문수의 수첩을 펼쳤다. 스케치북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을지 궁금했고 수첩에는 어떤 기록들이 있을지 궁금했다. 좋아하는 것을 먼저 고르고 먹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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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의 욕망과 근원적 외로움을 확인하는 이어령의 책상
먹을 갈 듯 인생을 사는 신영복의 벼루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는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
‘꼼수’보다 신뢰를 확인시켜주는 문재인의 바둑판
더 없이 교만한 자화상을 담은 겸손한 안성기의 스케치북
영원한 경계인이자, 비현실적 낙관주의자의 표상 조영남의 안경
당당함과 꼬장꼬장함을 그대로 기록한 김문수의 수첩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포용하는 유영구의 지도
예술가의 섬세함과 자유인의 대범함을 닮은 이왈종의 면도기
내면의 상처와 슬픔을 깎아낸 박범신의 목각 수납통
김갑수의 커피 그라인더, 윤광준의 모자, 김정운의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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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척하거나 교만한 것은 그리 나쁜 게 아니다. 가장 인간적인 덕목이다. 세상에 진짜 무서운 것은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자기 열등감’이다. 자기 열등감에 한번 빠지면 웬만해서는 헤어나기 힘들다. 남과 비교하고 괴로워하고 또다시 비교하고 또다시 괴로워하는 자기 부정의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p42> 나도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자기 열등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보다는 교만한 자가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 자존감이 높고 매사에 당당한 사람은 잘 살 수밖에 없다. 성별과 나이를 뛰어넘어 나와 똑같은 생각을 전하고 있는 저자의 마인드가 내 마음에 쏙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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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의 스케치북]
“연기를 하다가 여배우와 실제로 애틋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냐고 물었다. 안성기는 단호하게 없다고 한다. 배우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는 여배우를 보면 그 부모가 먼저 눈에 어른거리고, 그 배우의 가족들이 자꾸 생각나는데 어찌 에로틱한 느낌이 있겠냐고 반문한다.”<p244> 배우 안성기가 어떤 사람인지 이 글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인터뷰하는 내내 김정운도 ‘배우 안성기’와 ‘인간 안성기’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했다. 연기도 삶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안성기를 보면 커피 광고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부드러운 남자와 정직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연예인이라는 생각에 틀림없다. 안성기가 작은 스케치북에 그리는 그림은 자화상을 비롯해 아들, 가족, 자연, 정물 등의 아주 착한 주제들이다. 그는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며 그림을 그린다. 스케치북에 그날의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는 것도 좋겠다,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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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의 면도기]
“그는 자신의 그림을 여전히 ‘한국화’라고 이야기한다. 진경산수만이 한국화가 아니다. 시대가 변하면 내용도 바뀌는 것이다. TV나 자동차가 없었을 때 그림을 그렸으니 산이나 폭포만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사는 모습을 그리면 바로 그것이 한국화라는 것이다.”<P310> 그래서 이왈종은 골프공에 다양한 체위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화가의 그림은 음탕하지 않고 재밌고 즐겁다고 한다. 이왈종의 그림은 도덕적 굴레에서 풀려나는 통쾌함이 있다. 화가가 제주도에 내려와 함께 밥을 먹고 산에 다니며 친구가 되었던 고 김철호씨가 선물한 면도기는 고인을 추억하는 화가의 애장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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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목각 수납통]
“세월은 가난보다 무섭다. 그 착하고, 순수하고, 멀쩡한 인간들을 세월은 저토록 형편없이 망가뜨린다. 아, 나이 들면 몸에서 이상한 냄새까지 난다. 젠장.”<p330> 칠십 노인의 시인과 열일곱 풋풋한 소녀에 대한 사랑을 쓴 [은교]라는 작품을 쓰면서 박범신은 감정이입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픽션의 소설을 쓰지만 분명 그 소설에는 작가의 무의식적인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다시 태어나면 나무를 만지는 목수 일을 하겠다고 할만큼 나무를 다루는 손재주가 남다르다. 나무를 깎으며 세상과 화해하는 작가다.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이 나왔으니, 앞으로 여자의 물건이란 책도 나왔으면 좋겠다. 여자들은 어떤 것들을 고이 간직하며 애착을 보이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가방, 액세서리, 화장품, 옷 이런 화려한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자의 물건이라는 책은 김미경 인기강사가 써주면 재미있을 것 같다.
자기 이야기가 풍요로워야 행복한 존재라고 한다. 중년의 남자들이 이 책을 읽고 그들만의 물건들을 하나쯤 만들어서 이야기를 남기면 좋겠다. 늙어 보이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이보다 동안이라는 것은 훨씬 생동감 있게 젊게 산다는 증거다. 나도 젊게 사는 축에 들어간다. 일단 내 또래의 친구들보다 목소리 톤이 통통 살아있고 열정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젊게 사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연세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음은 20대’라고 말하지만 정작 마음도 늙는다고 한다. 몸이 늙는 것은 어찌할수 없지만 내 마음은 천천히 나이 먹도록 설레는 삶을 살 것이다.
선택의 자유는 인간 존재의 근거라고 했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 아무리 재미없는 행동도 내가 선택하면 재미있어진다는 저자의 논리가 꽤 설득력이 있다. 남들은 하찮고 따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좋아서 지금껏 만들고 있는 [순수산 가족신문]이 나의 첫 번째 애장품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20년 넘게 직장생활하면서 해년마다 기록한 다이어리와 매일 손에 쥐고 다니는 나와 호흡하며 살고 있는 손수첩이 나를 대변해 주는 물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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