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향기 풍기며...
작년 연초의 계획대로 우리는 해남 두륜산에 다녀왔다. 아이가 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끝나면 일년에 네번 우리가족 셋은 가족산행을 떠난다. 이름에 산(山)이 들어가는 남편과 사춘기가 와서 날마다 인상을 쓰고 다니는 인상파 아들과 나는 산에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그것은 그동안 스트레스를 준 시험이 끝났다는 증거이고 몸에 꽉 달라붙은 불편한 옷을 편안한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느낌이다. 청아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 마시고 흠뻑 땀도 흘리고 난 후 정상에서 간식 먹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먹어본 사람은 다 안다.
산행의 고수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물통 하나 들고 가겠지만 우리같이 하수들은 일단 먹을 것을 많이 싸들고 가야한다. 특히 먹는 재미로 산을 따라가는 아들에게 끊임없이 간식을 공급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부부의 귀는 아들의 재잘거림에 온전치 못할 것이다.
“엄마, 힘들어...”
“자기야, 아들 입에 쥐포 물려줘.”
“엄마, 땀 나...”
“자기야, 아들에게 음료수 줘.”
우리는 각자의 배낭을 멘다. 술,담배를 하지 않는 남편은 간혹 간식을 서로 먹겠다고 아들과 싸운다. 그래서 나는 가족의 평화를 위해 각자 먹을 분량대로 배낭에 넣어준다. 상대의 것에는 완전 노터치다. 배낭에는 라면, 김밥, 김치, 물, 음료수, 커피, 오이, 사탕, 귤, 쥐포 등 정확히 3인분 것을 챙기고 화장지, 관급봉투, 보온병을 챙기고 나면 들기에도 무거운 배낭이 된다.
두륜산에 오르는 날 바람이 엄청 불었다. 분명 앞으로 걸어가는데 우리는 꽃게마냥 바람이 세게 밀쳐 옆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두륜봉에 올라 가족사진을 찍는데 아들이 한마디 한다.
“엄마, 바람이 너무 황홀해.”
폐부까지 들어온 바람은 그동안 찌든 때를 말끔하게 청소해 준다. 그날따라 바람이 고마웠다. 어찌 도시에서 이런 바람을 만끽할 수 있겠는가. 시원한 바람에 날개죽지가 간지럽다. 숨겨둔 날개가 쭉 펴지면서 새처럼 날아갈 것 같았다. 정상에 올라 바위 옆에 자리를 잡고 우리는 먼저 라면에 물을 붓는다. 각자 다른 라면을 서로 한번씩 떠먹어본다. 행복한 라면을 먹으면서 부자지간 서로 더 먹겠다고 장난을 친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이런 즐거운 모습을 보면서 입맛을 다신다. 라면은 추운 날에 진가를 더욱 발휘한다. 폴폴 풍기는 라면 향기에 입맛을 돋아주고 후루룩 순식간에 라면발을 건져먹고 마지막에 뜨거운 라면국물로 속을 개운하게 풀어준다.
2009년 새 달력을 받았으니 이제 가족산행을 계획해야겠다. 내년에는 어디로 출발할까..
우리가족의 산행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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