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까는 엄마
“다리가 아파서 통 걸을 수가 없다.”
“엄마는 그러니까 파 좀 그만 까라니까요. 지금 어디세요.”
“병원에서 물리치료 받고 있어.”
“알았어요. 잘 받고 오세요.”
전화선을 타고 오는 친정 엄마의 목소리는 개미나 알아들을만큼 힘이 없다. 칠순을 앞둔 친정 엄마는 벽돌공장에서 일하다가 오른발 무릎 아래가 절단된 큰 사고를 당하셨다. 사고 직후 병원에 몇 달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엄마는 간혹 이렇게 말씀하셨다.
“발가락이 움직인다.”
“엄마, 무슨 말이예요.”
“발이 없는데 꼭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 같아. 발가락이 가려워...”
엄마의 사랑을 한참 받아야 할 초등학교 4학년때 사고가 났으니 내 어릴적 환경은 좀 우울했다. 큰딸로서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며 동생들을 건사하느라 나는 친구들보다 성격이 강하다못해 똑부러진다. 그 당시 엄마는 딱딱한 의족을 달고 퇴원하셨다.
엄마는 삼십 여년 동안 왼발 하나로 거친 삶을 지탱하며 참 부지런히도 사셨다. 한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동네 이모들과 하루에 쪽파 수십단을 까신다. 손톱 밑이 까맣게 변하고 갈라질 때까지 사방이 막힌 사무실 바닥에 앉아 독한 매운기를 마시며 파를 까신 것이다. 하루종일 열악한 상황에서 힘들게 일을 하시고 밤에는 끙끙 앓다가 불면증에 시달리며 거의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한지 오래 되셨다. 알콜중독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집 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젊은 나이에 홀로 한 다리로 세상을 의지하며 4남매를 키운다는 것이 엄마에게는 벅찬 삶이였다. 또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엄마에게 세상은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였다. 누가 등 뒤에 ‘바보’라고 써 붙여 놓아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엄마는 참 불쌍한 사람이다.
엄마에게도 분명 순수한 어린시절도 있었고 꽃다운 청춘도 있었을 것이고 남편의 사랑을 받았던 행복한 시절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 엄마의 이미지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오직 바싹 말라버린 사과껍질처럼 초라한 엄마의 지금 모습이 전부가 아닌가 착각하게 된다. 맛있는 사과 알맹이는 자식들한테 죄다 나눠주고 한쪽 귀퉁이에 버려진 쓸모없는 사과 껍질처럼......
“엄마, 맛있는 수박하고 족발 사 가지고 갈께요.”
“그래, 얼릉 온나.”
잠깐 은행에 다녀온다고 사무실 직원에게 얘기하고 나는 차로 이십분 거리에 있는 엄마집에 갔다.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집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따끈한 족발에 시원한 수박 한통을 사들고 도착한 것이다. 엄마는 평일 대낮에 큰딸 얼굴을 본 것이 신기한듯 얼굴가득 웃음을 머금고 나를 맞아 주셨다. 좀 전까지 다 죽어가는 개미소리로 아프다 하셨는데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나신 것일까. 먹음직스러운 족발 비닐 포장지를 벗기고 수박을 드시기 편하게 잘라 드렸더니 참 달게 잡수신다. 수박 한 조각을 내게 내밀며 같이 먹자고 하시는데 나는 먹을수가 없었다. 왠지 눈물이 먼저 떨어질 것 같았다. 엄마 입으로 들어가는 족발과 수박을 보면서 내 마음이 벅차 올랐다. 예전에 우리들 입에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배가 부르셨다는 엄마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엄마는 자식이 그리운 것이다. 자식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조금 아픈 것도 나한테는 뻥 튀겨서 많이 아프시다고 하신다. 그래야 헐레벌떡 달려오니까... 엄마는 이제 아이가 돼 버렸다. 아프다고 울어야 마지못해 쳐다봐 주는 못된 자식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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