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맞벌이로 주말만 되면 업무 스트레스를 풀고자 산행을 자주 간다. 결혼 20여 년이 되어 가는데, 이 나이에 취미가 같은 것도 큰 복이라 생각한다. 이번 산행은 집에서 가까운 담양 추월산으로 정했다. 10년 전에 가본 산이라 네비게이션도 챙기지 않고 남편은 그냥 감으로 운전해서 갔다. 그럼 그렇지. 남편은 추월산에 도착하기까지 길을 두 번이나 잘못 들었다. 남편은 자타가 인정하는 치명적인 길치다. 방향감각 거리감각이 어쩜 이렇게 없을까. 그런데 남편의 취미가 산행이다보니 나는 항상 초긴장 상태가 된다. 이정표대로 따라가도 길을 헤매고, 네비게이션이 말하는 대로 운전해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다. 함께 산에 가면서 길을 잘못 드는 것 수없이 봐왔기에 산에 오르기 전에 나는 이길이 맞다, 남편은 저길이 맞다,라며 한바탕 설전을 해보지만 최종 승리자는 항상 나였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더니, 추월산이 정갈하게 잘 조성되어 있었다. 추월산 계단참 벤치에 앉아 담양호를 내려다보며 폐부에 찌든 더께도 씻고 서로 사진도 찍고 간식도 맛있게 먹었다. 막바지 힘든 산행을 거친 후 우리는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산행 초입 등산로 표지판에서 우리는 제1등산로로 올라가서 제3등산로로 내려오자고 했는데, 막상 정상에 오르니 표지판에 있는 것처럼 쉽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 표지판을 아주 대충 어리버리하게 본 것이다. 올라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기는 싫다고 하며 남편은 궁여지책으로 밀재 2.2km 라는 곳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분명 주차를 해놓은 추월산관리사무소가 나올 것이라고 찰떡같이 믿고서 말이다.
밀재로 내려가자고 했을때 내가 강력하게 말렸어야 했는데....... 남편의 자존심을 한번 세워주고자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우리는 정상으로 올라왔던 길과 정반대의 길로 산을 꼬박 넘어서 내려간 것이다. 이상하게 밀재로 내려가는데 등산객이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가 내려가는 길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주차장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힘들게 내려왔건만, 웬 고속도로가 달랑 나온 것이다. 이럴때 멘붕이라는 말을 사용하나보다. 어이가 없었다. 과연 여기는 어디라는 말인가? 씽씽 달려가는 차를 세워보려고 나는 히치하이킹을 처음으로 해봤다. 영화에서는 멋지게 보이던데, 막상 해보니 내 처지가 불쌍하고 한심했다. 차는 나를 못본척 하고 막 달리더라.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다행히 자전거를 타고 혼자 여행하는 청년을 만나 여기가 어디쯤이냐고 물어보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현재 위치를 검색하더니 추월산 주차장까지는 8km 정도 가야 된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한번 멘붕이 왔다. 우리 부부는 둘다 구식 폴더폰이였다. 지금까지 폴더폰이 좋다며 자긍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이 순간 우리는 구석기 시대 부싯돌을 이용해 불을 피우는 꼴이 되었다. 일단 청년한테 고맙다고 얘기하고 8km 를 도저히 걸어가기엔 어둠이 찾아와서 힘들 것 같고 그렇다고 내려왔던 산을 거꾸로 다시 올라가자니 이건 산 속이라 더 위험할 것 같아 나는 다시 히치하이킹에 도전했다. 남편은 본인이 선택해서 이뤄진 일이라 아무말도 못하고 고속도로를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이 한마디 했다.
“모든 길은 통하게 되어 있어. 이것도 추억이니 우리 둘이 신나게 걸어가자.”
말이나 못하면 덜 밉지... 손을 들어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차를 세워보려고 나혼자 갖은 고생을 하는데, 일곱번째 승용차가 우리 앞에 서는 것이다.
우리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차에 타고 있던 연인들은 전북에서 담양으로 가는 길이라며 기꺼이 태워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마울수가, 세상은 이런 사람들 덕분에 참 살만하다. 우리는 저 아래 삼거리까지만 태워주면 거기에서 택시를 타고 주차장까지 가겠노라고 했는데, 이 마음씨 좋은 분들이 주차장까지 태워준다는 것이다. 8km 가 얼마나 멀게 느껴지던지, 굽이굽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쉽게 주차장이 나오지 않아서 태워준 분들한테 미안했다. 태워줘서 정말 고맙다고 연신 얘기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여자친구가 저 부부 등산객들이 혹시 차를 태워달라고 세우면 태워주자고 했다는 것이다.
주차장에 도착한 후 우리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가시다가 두분이 차 한잔 하시라고 3만원을 드렸더니 절대 안받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마음씨 착한 그분들도 뭘 바라고 한 것이 아니는 것을 알지만 우리 입장에서 이렇게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차 안에 던지다시피 하고 차에서 내려 안전운전 하라며 배꼽인사를 했다. 그분들도 손을 흔들어 잘 가라며 활짝 웃으셨다.
“세상에는 이렇게 좋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 추월산 하면......밀재 사건이 떠오를 것이고, 오늘 이 일을 두고두고 살면서 얘기하겠지. 밋밋한 산행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산행을 내가 만들었잖아.”
본인 때문에 생 고생을 했기에 한동안 말없이 있던 남편이 주차장에 도착한 후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어찌나 황당하고 웃음이 나오던지 결과적으로 좋은사람을 만나 흐뭇한 산행이 되었지만 치명적인 길치인 남편의 활약상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펼쳐질 것이다.
[이 도로를 8km 걸어서 주차장까지 가보자는 울황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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