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불태산이다. 불태산에 오르는데 힘이 든다. 등산객이 보이지 않는다. 남편과 나뿐이다. 등산객이 별로 없다는 것은 산세가 험악하거나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거나 또는 등산로가 잘 정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깃대봉 헬기장으로 오르는데 등산로에 서 있는 산딸기와 앉아 있는 뱀딸기를 만났다. 먹음직스러운 산딸기를 남편은 비탈진 곳으로 내려가서 가시에 찔려가며 따와서 내게 건넨다. 산딸기에 대한 추억이 없기에 풀 열매 같아서 나는 먹지 않았다. 대신 보암직스러운 뱀딸기를 찬찬히 쳐다보며 신기하게 생겨서 사진을 찍었다. 붉은 빛깔을 보니 뱀이 좋아할만한 딸기 같다.
산에 오르면서 보니 불이 난 흔적이 있다. 화재가 난지 몇해쯤 된 것 같은데 생나무가 꺾여 넘어져 있고, 다 죽어가는 주목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나무를 바라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어느 누구의 잘못으로 푸르러야 할 숲이 까맣고 허허로운 산이 되어버렸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불태산 정상 고지는 720m 밖에 되지 않았다. 1,000m 넘는 국립공원을 몇 군데 다녀왔기에 이 정도의 고지는 만만하게 봤다. 사방댐에서 출발해 정상석이 있는 불태봉까지 봉우리를 3개를 넘어야 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은 어리숙하기 마련인데 이것이 등산이라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등산객이 많이 다니지 않은 산은 이유를 막론하고 가지 말자고 숱한 산을 다니면서 내린 결론이건만, 가보지 않는 산에 대한 미련 때문에 산에 오르곤 한다. 새로운 산에 가봤다는 이력에 한 줄 더해지는 쾌감은 무모한 도전이다. 그러면서도 강행한 불태산이었다.
힘겹게 깃대봉에 올라가서야 사람을 만났다. 상대편도 우리가 반가웠던지 나를 보더니 “와우, 여자다.”라고 반갑게 환호했다. 그만큼 등산객도 없었지만 여자는 그 여자와 나 둘뿐이었다. “수고하십니다.” 산에서 등산객을 만나면 늘상 건네는 인사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산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는 자로서 보이지 않는 신뢰와 끈끈한 정이 있기 때문이다.
지칠대로 지쳐서 터벅터벅 힘들게 내려가고 있는데 남편이 길을 잘못 들었나보다. 헬기장에서 1km 정도 사방댐이 아닌 귀바위 쪽으로 내려가다가 왠지 오를 때 봤던 풍경이 아니었던지 앞서가던 남편이 멈춰섰다. 나는 혹시 잘못 내려갔는지 남편에게 물었다.
세상 일이 어디 호락호락하던가. 마음 먹은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는다. 무엇이든 잘못된 것은 꼼꼼하게 점검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또 배운다. 산에서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위험한 상황에 부딪친다. 잘못 내려간 길을 다시 걸어 오면서 남편하고 말 한마디 없었다. 힘들기도 했지만 말을 했다가는 싸움이 될 것 같았다.
“마누라!, 무사히 하산하면 맛집에서 시원한 물냉면과 비빔냉면과 익힌 비빔밥까지 3인분 시켜서 먹자.” 배낭 속의 모든 간식이 똑 떨어지고 물한방울도 남김없이 마셔버려서 우리는 배가 고팠다. 힘들고 배고프고 지치다 보니 하산하여 식당에서 맛있게 냉면을 먹고 있을 우리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남들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지금 우리에게는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 된다. 배부르게 먹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거창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다. 배가 고프니 냉면 먹는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극한 상황에 처하면 행복이 소박해진다.
비록 심장이 터질 듯이 벅찰때도 있지만 정상을 목표로 산에 오를 때는 힘이 솟는다. 그러나 등산보다 어려운 것이 하산이다. 육체적으로 지치기도 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내리막길을 헛딛게 되어 넘어질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산하다 보니 오를 때 생각하지 못한 고바위가 상당히 많다. 왼손에 스틱 두 개를 거머쥐고 유격훈련처럼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보니 사방댐 출발점에 도착했다.
결국 너무 힘들어서 갓봉에서 불태봉을 600m 남겨두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높지 않는 산이라고 얕잡아 보다가 낭패를 당한 꼴이다. 사전지식 없이 힘들게 산에 다녀온 후에야 비로소 불태산에 대해서 알아봤다. 불태산은 2015년 3월에 산불이 3번이나 났다. 불에 타버린 산을 등산객들은 외면했을 것이다. 아울러 남쪽 산자락에 군사 훈련소가 있어서 민간인 통제구역이었다가 최근에 완화되면서 등산객이 찾는 산이라고 한다.
불태산 정상석에서 인증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웠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지 않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등산로인지 많이 헷갈렸고, 이정표도 세월에 씻겨져 잘 보이지 않았다. 등산객을 위해 관계 당국이 등산로를 안전화게 정비해 주길 바래 본다.
등산할 때마다 매번 산에서 배우게 된다. 장성에 있는 불태산은 나에게 앞으로 더 겸손하게 살라고 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전체가 아니니 쉽게 판단하지 말란다. 내면을 읽을 수 있는 깊이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한다. 7.5km 거리를 6시간 동안 걸으면서 얻은 큰 깨달음이다. 두 발이 아니라 온 몸으로 산에 오르고 내리면서 힘들게 터득한 가르침이다.
[뱀딸기와 산딸기]
[불타버린 나무들]
[햇무리가 뒤로 보인다]
[찔레꽃향 가득]
[산행이 거의 유격훈련 수준]
[2인 3식]
'순수산 이야기[2] > 힐링,나의 산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월산 6] 볼거리가 먹거리에 양보한 산행 (0) | 2020.04.02 |
---|---|
[구봉산] 아홉 개의 봉우리를 찾아가는 재미 (0) | 2019.06.20 |
[추월산] 1122 계단을 오르다 (0) | 2019.02.08 |
[순창 강천사] 산도 휴식이 필요하다 (0) | 2018.12.12 |
[고창 선운사] 1000m처럼 느껴진 정상 수리봉을 찍다 (0) | 2018.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