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산 이야기[2]/행복,나의 글쓰기

천관산 기행

순수산 2005. 12. 24. 10:31
천관산(天冠山) 기행    


억새가 억세게 좋다는 장흥 천관산(天冠山) 가을초대에 응하기로 가족은 합의했다. 한낮에는 은빛 모습으로 솜꽃을 피우다가 붉은 노을과 함께 금빛으로 변하는 아름드리 비단물결에 같이 춤도 추고 싶었고 자꾸만 구경오라며 손짓하는 유혹를 뿌리치기 힘들었다. 산행에 빠지지 않는 필수과목인 컵라면 세 개, 과일 서너가지, 뜨끈한 커피를 챙겨 장흥으로 향했다. 라디오에서는 기회는 이때다 싶을 정도로 가을노래를 뿜어올린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더니 장흥 천관산 억새제 행사가 하필이면 당일이다. 사실 무슨 행사가 있다하면 주체는 뒷전이고 사람구경하고 오는 일이 태반인지라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가족은 꼭 행사를 비켜가는데 그곳에 도착하여 현수막을 보고 알았으니 어쩔도리가 없었다. 오전11시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삼십여대의 관광버스는 주차장에 즐비하고 자가용은 가로수마냥 도로가를 점령하고 부족한 주차장을 해결코자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임시방편으로 주차까지 할만큼 오늘의 등산객 수를 여실히 보여준다.


천관산의 산행은 처음인지라 맛선보는 처녀의 설레임을 안고 울긋불긋 등산객의 대열에 합류했다. 지역주민은 추수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데 오직 도시인만 한가로이 등산을 가는 듯 하여 그들에게 미안함이 앞선다. 정상을 향해 정신없이 올라가는 우리에게 낫을 들고 일터로 향하는 구부정한 할머니의 생각이 내 귀를 때린다.

"뭐땜시 먼디서 와갔고 힘들게 올라간지 모르겄네. 올라가면 내려올 것들이...  징허게 헐 일이 읎는갑다"


아기바위, 사자바위의 기암괴석은 기이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천주봉 관음봉 선재봉의 아홉 개 봉우리가 흔히 볼수 있는 경관이 아니였다. 온화한 듯 하면서 급경사에 부딪치고 정상이 눈앞에 있는 듯 하다가도 한참을 더 가야하는 쉽게 제모습을 비치지 않는 장난꾸러기 같았다.


오가는 통로가 좁은 곳에서는 힘이 두배로 들었다. 내려오는 사람 다 내려갈 때까지 기다리다보니 호흡이 끊기고 사람과 부딪치지 않으려니 긴장이 더 되고 순간 방심으로 한발만 헛디더도 아찔함을 겪을 것 같아 온 감각기관을 송두리째 세웠다. 혹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정상까지 못가고 하산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갈 때마다 물을 마셔 체온을 유지하며 쉽게 피로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남편과 아이는 뒤쳐져 가는 나에게 빨리 오라며 재촉한다.  그 재촉되는 소리에도 자꾸만 둔부는 처지고 숨은 가빠오고 산은 험하여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내사전에 포기는 없다며 강한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힘이 들때면 저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위안을 삼고 한차례 쉬고 또다시 정상을 향해 발걸음 옮기기를 여러번 내눈에 고지(高地)를 알리는 반반한 평지가 들어왔다.

󰡒다왔다󰡓무려 3시간동안 올라온 것이다. 이곳에 무엇이 있길래 이리도 힘들게 올라왔을까!


연대봉 정상에 올라와서야 억새다운 억새를 볼수 있게 되었다. 그 억새들은 은빛을 토해내며 고개 숙여 졸고 있었다. 군락의 맛이 이런 것일 것이다. 떼지어 있는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다. 무등산의 억새와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다. 더 작고 가늘고 힘이 부치듯 지쳐보였다. 내 마음 같았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시원하게 밀려왔다. 우로는 잔잔한 남해 작은배 물살을 가르며  좌로는 황금들판이 반듯반듯 정돈되어 노란콩 시루떡를 막 쪄낸 듯 먹음직스럽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시장기가 도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 일행들이 먹는 점심은 고만고만하다. 유독 우리만 맛난 김 폴폴 풍기며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폐부까지 꿰뚫은 바람을 쏘이며 따뜻한 국물을 후루룩 마시노라면 온몸을 샤워한 듯이 시원하다. 과일과 커피로 입을 헹군후 순간순간 가을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늘따라 남편은 뚱뚱한 내 허리를 감싼 포즈로 마음을 전한다. 밉지 않다.


행사는 무르익은 듯 ‘억새아가씨’ 선발 대회를 한다. 수영복 심사는 안 할테니 멋드러진 등산복을 입었으면 신청 접수하라한다. 한번 나가볼까 마음 먹었는데 아줌마는 사양한다며 나이 오십이 넘어도 현재 솔로이면 된다하니 그 사회자 입담이 걸쭉하다. 오. 엑스 퀴즈로 재미를 더하며 풍물과 판소리 한마당도 귀를 즐겁게 한다. 하늘에 오색빛으로 떠오르는 패러글라이딩는 자유 평화를 외치며 내 머리위에 닿을 듯 그 패기가 전해진다. 분명 내려오는 길은 여유가 한발작 앞선다. 오르는 사람 헉헉대는 숨소리도 정겹게 들리고 내려다 보이는 풍경화 속에 한점 박혀있는 인물처럼 그 자연에 동화된다.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좁은 길에 도달하니 각지방의 토속어는 귀를 흥겹게 하고 산지기 같은 육십대 아저씨는 입담 좋은 말로 지루함을 덜어낸다.

"사돈이 얼라를 낳는다고 연락이 왔는데 얼릉 가봐야 하는디 이리 지체되면 어찌할꼬?" 힘들게 오르는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게

“아가! 뭐 할라고 올라갈라 하냐? 꼭대기에 가도 피자 햄버거 안주더라”


내려오기도 힘든 직각에 가까운 경사이지만 몇 명의 학생은 배낭을 메고 다람쥐마냥 뛰어 오른다. 그 젊음이 눈부신다. 산을 내려오니 쌉소름한 향을 내뿜는 소나무, 빠알간 동백꽃이 그려지는 동백나무, 상수리나무 때죽나무의 모습이 발걸음을 잡는다. 어디에서 맑디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보물을 발견한 듯 기뻐 냉큼 한걸음에 달려간다. 맑은 계곡물에 바지를 걷어올리고 맨발로 들어가니 성능 좋은 파스를 붙인 듯 싸~아 싸~아 피로가 녹는다.


일주일동안 쌓였던 피로를 풀고자 자연을 찾을 때의 육체적인 고생은 고생축에 들지 않는다. 여유로운 정신을 살지우고 즐거움을 한아름 안고 돌아오는데 어찌 고생스럽다 하겠는가. 매사 투덜대며 사는 나에게 자연은 풋풋한 기운을 실어주고 아무 말없이 포근히 안아준다. 내 기운을 담아 가족을 동료를 친구를 꼬옥 안아주는 너그러운 사람이 돼라한다.

호남의 5대 명산에 속할만큼 빼어난 모습을 간직한 천관산에도 옥의티는 있었다. 쿠리한 화장실냄새와 부대시설 관리소홀로 미관을 실추시켰다. 전국 등산객이 산을 찾아와서 돌아갈때는 실망을 안고 가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2003.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