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을 담은 큰 가방
출근길 신호대기에 걸려 정지선에 서 있는데 신호등을 건너는 중학생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학생들보다는 그들이 매고 있는 가방이 눈에 띄였다. 손바닥만한 가방(과연 그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을 매고 교과서를 몇 권 손에 들고가는 모습이 어쩐지 우스웠다. 아니 큰 가방을 사서 그 안에 넣고 다니면 불편하지 않을텐데...... 노파심이 든다. 내가 저 아이들만한 나이에는 교실에 개인 사물함도 없었지만 큰 책가방 안에 하룻동안 든 교재를 죄다 넣고 다녔다. 그래서 가방이 크고 묵직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범생과였다.
체질상 앙증맞은 작은 가방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문득 조수석에 있는 내 가죽가방에 시선이 갔다. A3 사이즈의 큰 가방이 몸을 푼 여자처럼 널브러져 있다. 다섯 개의 칸으로 나누어진 큰 가방에는 무엇이 들었지. 날마다 무의식적으로 들고 다니는 출근가방이 맞선보는 남자처럼 궁금해졌다. 학생들의 작은 가방을 개탄하며 혀를 찼는데 그럼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나는 얼마나 자랑할만한 것들이 들어있는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 있는 것을 책상에 쏟아냈다.
가죽가방 안에는 지갑이 세 개가 들어있다. 평소 사용하는 장지갑 안에는 신용카드 세 장, 지폐, 대중탕 쿠폰, 사진, 명함...이것도 날 잡아서 정리해야할 판이다. 질서가 없다. 예비용 장지갑에는 식당, 빵집, 미용실, 옷집, 마트, 주유소의 포인트 카드가 들어있다. 동전이 들어있는 동전지갑도 가방무게에 일조한다. 티슈, 수첩, 책, 도장, 샘플 화장품, 손수건, 껌, 사탕, 볼펜 기타 등등.
특별히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왠지 없으면 허전한 물건들이다. 정말 어떤 날에는 굳이 이렇게 큰 가방을 날마다 들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작은 백에 지갑과 핸드폰만 달랑 넣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속옷을 안 입고 겉옷만 입은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기질적으로 어울리는 큰 가방을 몇 년째 들고 다니게 되었다.
평소 손바닥만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여성들을 보면 어딘가 부족하고 허전해 보인다. 그들과 달리 나는 다른 일에는 똑부러진 편인데 가방의 물건한테는 한없이 너그럽고 미련이 남는다. 특별한 것도 없는데 아주 평범하고 보잘것 없는 것들을 담고 다니는데 혹시 학창시절 큰 가방이 주는 우월감에서 사로잡혀 헤어나오지 못한 것은 아닐까. 큰 가방이 주는 편리함도 크겠지만 혹시라도 그렇다면 나는 미련퉁이 바보다. 가방에는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나누지 못하는 내 잇속만 챙기는 욕심 덩어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가방부터 깔끔하게 정리해서 가볍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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