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산 이야기[2]/행복,나의 글쓰기

가거도

순수산 2008. 9. 20. 11:03

가거도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왔던 내게  ‘고향’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정지용 시인의 ‘향수(鄕愁)’가 그려진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아


  적어도 고향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싶었는데 시댁이 있는 섬에 가면서 상상 속의 고향은 깨지고 말았다. 기암괴석과 후박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박나무 껍질은 한약재로 이용되어 섬사람들의 큰 소득원이 되고 있다고 전하는 고향은 사실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가거도’는 사람이 가히 살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결혼을 하고 처음 시댁을 갔다. 광주에서 가거도까지 가는데 하루가 꼬박 걸린다.  고속버스 2시간, 쾌속형 배로 2시간, 큰 배로 4시간, 작은 배로 1시간을 가야 목적지에 도달한다. 처음 타 본 날개 달린 쾌속형 배는 바다 물살에 둥 떠서 내려앉기를 반복, 놀이기구 바이킹을 연상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 바이킹에 몸을 실은 듯 함성까지 지르며 무척 즐거운 표정들이였다. 나는 배에 몸을 실은 순간부터 눈을 감았다. 넘실대는 파도만 보아도 멀미가 난다. 아찔한 바이킹의 스릴은 멀미를 더욱 부축였다. 시댁 찾아가다가 탈진해서 죽는 것은 아니겠지. 2 시간 동안 진이 다 뺀 후 1차 경유지인 흑산도에 배가 도착했다.


 

 <섬 위의 하얀 집이 우리집~~~~>

 

  흑산도에서 다시 갈아타는 통통통 뱃고동을 울리는 큰 배는 끝없는 바다를 무료하게 4 시간을 달리더니 가거도 1구에 도착했다. 시댁은 가거도 2구라 다시 작은 배를 타고 1시간 가량 달렸다. 10여 명을 태운 작은 배는 부서지는 파도에 여러번 부딪치더니 팔과 다리에 하얀 염분을 남겼고 쪼그라진 배를 움켜잡고 마지막 노란 위액까지 쏟아 붓고 나니 허깨비가 되었다. 남편은 고향가는 길일지 모르지만 나는 지옥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 목적지를 향해 쉼없이 질주하는 배는 유약한 나를 싣고 나의 몸무게를 무려 5 킬로그램이나 뺀 후 고향이라는 섬에 내려 놓았다. 섬에 내 첫발을 옮기는 순간 심호흡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아! 이제 살았다.”

어릴적 친구들과 처음 떠났던 여행이 생각났다. 여행의 낭만을 건지기 전에 낯설은 풍경에 긴장과 무서움이 몰려와 괜한 후회가 먼저 들었던 기억. 귀가길이 가까울 때쯤 익숙한 시내버스의 번호만 보아도 반가워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 바다 위가 아닌 내 발이 닿는 섬에서의 느낌과 비슷하다.


호랑이 굴에 가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는데 아무리 멀미가 심할지언정 정신력으로 버티면 될텐데 난 정신력이 부족한 사람일까 괜한 자격지심까지 들었다. 고향이 먼 사람과 살아야 된다는 것이 아찔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짝꿍이 신안군이 고향이라며 집에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고 했었다. 광주 토박이인 나는 그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렇게 먼 곳이 나의 시댁이 될 줄이야.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던가. 쓰라린 고행길을 통해 얻어지는 달콤한 맛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섬 꼭대기에 있는 집은 창문만 열면 탁 트인 바다가 여과없이 몰려 들었고, 해가 질 때면 너울지는 노을에 온 집안이 붉게 물들었다. 물이 맑아서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을 투명하게 볼 수 있었고, 초록색의 섬을 안개가 감싸고 있는 전경이 날마다 펼쳐진다. 어디에서나 신선하고 위대한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아름답게 보존된 만큼 불편한 점도 많아 그곳에서 살아가는 부모님은 힘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라 날씨라도 궂은 날이면 섬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고, 물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태풍이 불면 생계를 위한 배조차 띄울 수가 없었다. 섬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섬사람들은 모진 풍파에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인지 늘 강하고 강하다보니 억세다. 주변 환경이 말해주겠지만 타지와 고립되어 살다보니 배려심도 부족하여 소란한 일도 간혹 빚어졌다.


부모님만 남겨두고 섬을 떠나 올때는 마음이 아렸는데 자연의 순리대로 정직하게 살고 계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고생을 무릅쓰고 다시 찾을 것 같다. 중국에서 우는 닭소리가 들린다는 가거도는 분명 나의 고향이다. 청정한 바다 속에 뛰어들어가 소라를 따오던 남편이 물개마냥 미끈하다.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쌉쓰름한 소라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남을 것이다. (1999)

 


10년 전에 썼던 글이다. 그렇게 힘들게 가거도를 찾아갔던 여정을 그린 것인데...

세월이 흘러 지금은 많은 것이 편리해졌고 멋진 둘째네가 발전시켜 놓았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잡아 훌쩍 갔다올수도 있다.

예쁜 조카녀석들 보러 정말 시간내서 찾아가 보리라. 

 

 <둘째네>

지금은 둘째네가 가거도를 지키고 있다.

주의 은혜로 우리집에서 영화<극락도 살인사건>도 찍고

1박2일 촬영도 하고

방송도 여러번 나왔다.

섬누리로 클릭하면 생생한 그곳 현장을 감상할 수 있다. 

http://www.sumnu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