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이공이공이라는 생경한 한해를 맞이했다. 새로운 마음을 다잡고자 해마다 무등산을 찾아갔는데, 올해에는 담양 금성산성으로 방향을 틀었다. 힘든 산행보다는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산책을 하고 싶어서이다. 머릿 속에 가득 찬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이 많아지니 몸도 지치게 된다. 하여 힐링하고자 이 코스를 선택했다.
한해를 출발하는 1월 1일. 자연을 벗삼아 걷는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 묵은 생각과 감정의 찌꺼기를 비우고 새롭게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산책만큼 좋은 것도 없다. 해맞이 인파를 벗어난 오전 10시에 집에서 나섰다.
전날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1시 20분이 되었다. 해마다 해오던 연례행사라서 몇시간 밖에 잠을 못 자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예배시간 끝날 쯤에 올한해 주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말씀카드를 뽑는데, 괜히 긴장되고 설레게 한다.
내가 뽑은 말씀은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이사야 44:3>" 계속 읽어도 너무나 좋은 말씀이다. 은혜가 되고, 평안을 준다.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올 한해를 잘 살자.
금성산성을 걷는데 한적해서 좋다. 보국문에서 해맞이 떡국을 아침 7시부터 등산객들에게 준다는 현수막을 읽었다. 이 행사가 10년도 넘었는데 나는 처음 알았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없어서 뚜벅뚜벅 걷는데 여유가 느껴진다. 걷다보면 산이 나를 토닥토닥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자연은 어느 때에 찾아가도 엄마품처럼 따뜻하게 안아준다.
올해 출석하고 있는 교회학교 고등부에서 부장을 맡게 되었다. 고등부 교사를 시작한지 만 8년째 부장이 되었다. 교사와 학생을 포함하면 100여명 정도 되는데 한 부서를 이끌어가는 부서장이 된다는 것이 어깨를 무겁게 한다. 잘 해낼 수 있을지, 리더의 품격을 잃지 않고 이끌어갈 수 있을지, 힘들더라도 오직 사랑과 섬김과 나눔으로 품을 수 있을지 2년 동안은 내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충성하고 순종하자고 나에게 당부를 한다.
교역자와 부장과 부감이 삼박자를 잘 맞춰야 불협화음 없이 부서를 이끌어갈 수 있다. 그런데 작년 말에 교역자와 부장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하여 온통 내가 부서를 떠앉게 되었다. 혼자 계획하고 추진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작년에 부감을 1년 동안 하면서 부서의 일을 해내긴 했으나 부장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었다. 차원이 다른 무게로 그동안 고민이 많았다.
또한 연말을 깃점으로 3월까지 회사 일은 얼마나 많은가. 이 일을 20년 넘게 하고 있는데 이제는 좀 지친다. 9개 공종의 6개 사업장 회계과 총무를 맡고 있다. 12월에는 4분기 세금정산을 시작으로 실적, 연말정산, 법인세 결산까지 계속 이어지는 업무로 정신없이 바쁘다. 처음 접하는 일이라면 생각없이 그냥 부딪치면 되는데 다 알고 있는 일이라 그 일을 접하기 전에 미리 걱정이 앞선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 맞선다.
금성산성은 열 번도 넘게 올랐었다. 걷는데 그때마다 동행했던 지인들이 떠올라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의 추억이 오롯이 떠오른다. 몇 년 전에 교회 고등부 선생님들과 함께 이곳을 올랐는데, 그 선생님들의 힘든 모습과 땀방울까지 기억이 난다.
아름드리 큰 나무 그늘 아래 해맑게 웃으며 사진 찍었던 우리 부부, 뜨거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산행을 했던 날,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한조각에 행복했던 그날의 기분까지 느껴진다. 사진을 자주 찍다보니 신기하게도 내가 찍었던 피사체 그대로 기억에 남는다. 눈이 소복하게 내린 작년에는 절친 부부 한쌍과 함께 했는데 그때 찍었던 사진 몇 컷이 파노라마가 되어 기억을 스친다.
추억이 많은 자가 행복한 것 같다. 물론 기분 좋은 추억이겠지만 말이다. 행복한 추억이 많은 자는 삶이 더 풍성해질 수밖에 없다. 왕복 2시간의 산책 속에 고민과 생각은 비워진 듯하다. 행복했던 금성산성의 추억만 가득 채워서 내려오게 되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산책이라 다리는 뻐근했다. 그러나 기분 좋은 땀을 흘렸고, 산허리에 앉아서 먹었던 뜨거운 커피와 간식은 진수성찬이었다. 하산 후 온천욕도 좋았고 점심겸 저녁식사로 먹었던 보리밥도 참 맛있었다.
산책은 생각 정리다. 새해 첫날, 내가 좋아하는 산책을 다녀와서 행복하다. 이런 충만한 행복을 올 한해도 자주 갖자.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고 했다. 소소한 작은 행복을 자주 만들어서 맛보자. 복 받기 위해서는 복을 잘 짓자.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올해 50권이 전해 줄 책여행은 꼭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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