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산 이야기[2]/내 인생의 수필집2

나의 오래된 벗, 노트북

순수산 2020. 4. 2. 13:12






    


먼지가 쌓일까봐 수건으로 꽁꽁 감싸 놓았다. 시간이 지나자 수건 위에는 요가 복이 개켜져 있고 또 그 위에는 책이 몇권 올려져 있었다. 수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지 못한 세월이 길다 보니 그 존재에 대해 까무륵 잊고 살았다.


수건 안에 있는 그 존재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어서 화장대를 정돈하다가 책을 걷어내고 요가 복을 걷어냈다. 그리고 수건을 걷어내니 대학노트 크기의 까만 노트북이 얼굴을 내민다.


새 아파트로 이사 온 지 2년이 되어가니 이 친구의 얼굴을 쳐다본지 얼추 그 세월쯤이 되어간다. 부푼 꿈을 안고 안방 화장대를 미니 서재로 만들었다. 화장은 5분이면 끝나니 몇 개 되지 않는 화장품은 수납함에 넣고 사용했다. 대신 화장품을 진열해 놓을 자리에 나는 노트북과 글을 쓸 수 있는 노트와 볼펜, 그리고 몇권의 책을 항상 놔뒀다. 그러나 일상의 분주함 치여서 글을 써보겠다는 꿈은 희석되고 화장품 진열대의 모습은 잡동사니로 쌓여갔다.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그 무거운 노트북의 덮개를 오늘에서야 들어 올린 것이다.


새순이 싹트는 봄날이다. 좋은 기운을 품고 새롭게 태어나는 어린 순들을 보면서 내 마음도 새롭게 다잡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노트북과 하나가 되어 비장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이것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노트북이 내게 온 그 해를 잊을 수 없다. 나의 첫 간증이기 때문이다.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은 2008년도였다. 제자 12명이 훈련을 받았는데 매번 은혜와 감동의 시간이었다. 훈련이 끝나가는 12월에 각자의 비젼을 세가지씩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30대 후반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던 나는 일주일간 고민한 끝에 비젼을 작성해서 발표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셀리더가 되겠다고 말했으며,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성장 시킬 것이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글을 쓰겠다고 발표했다.


비젼 세가지를 발표하고 딱 일주일이 지났을 때다. 지인이 내게 연락을 해왔다. 선물로 받은 노트북이 있는데, 글을 쓰는 내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본인도 사용하고 싶지만 내게 주고 싶다는 전화였다. 우리 훈련 동기들만 들었던 내 비젼을 어떻게 그 지인이 알고 그런 결정을 했을까. 그때 나는 얼마나 짜릿한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글을 쓴다고 했던 내 마음을 주님이 아셨을까. 그래서 내 음성을 들으시고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 것일까. 주님 바라보는 내 마음이 순수해서 노트북을 선물해 주신 것 같았다. 노트북을 선물해주신 하나님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셀리더도 되게 하셨고, 교회 학교 고등부 교사로 지금껏 봉사를 하고 있다.


그런 사연이 있은 노트북이 어제까지 깊은 잠을 자고 있었는데, 나는 오늘 깨웠다. 우리 같이 역사(history)를 써보자고. 이제 그만 게으름에서 벗어나자고. 우리가 서로 으쌰으쌰 힘을 내서 은혜와 감동의 현장을 기록하자고.


내 친구 노트북은 나이를 많이 먹었다. 이 친구는 최신 사양에 비하면 속도가 떨어져서 인내심을 길러준다. 인터넷에 연결하려면 여러 절차를 밟아야 된다. 그렇기에 아예 인터넷 연결은 하지 않고 오직 글만 쓴다. 인터넷 서핑하다가 다시 글쓰기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적어도 없으니까.


남편은 거실에서 49인치 텔레비전으로 뉴스를 보고 있다. 아들은 제 방에서 스마트폰을 자라목이 되어 쳐다보고 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우아하게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창의적인 일을 하고 있는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은 흐뭇한 기분이 든다. 일방적인 바라봄이 아니라 사색하며 생각한 것을 내 친구 노트북과 교감하며 백지를 까맣게 채워가고 있지 않는가.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 너에게 쓴 마음이 / 벌써 길이 되었다 /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오늘따라 천양희 시인의 <너에게 쓴다>라는 시가 떠오른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때의 느낌이라고 한다. 글쓰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 오늘 했던 많은 일 중에서 가장 의미 있고 괜찮은 일을 하고 있다. 내 친구 덕분이다. 그 공을 나의 오래된 벗 노트북에게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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