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 처서가 지나니 더위가 한풀 꺾였다. 제아무리 덥다해도 절기는 어쩔수 없나보다. 열대야로 이불을 발로 찼던 때가 엊그제였는데, 슬그머니 이불을 손으로 당기게 된다. 오늘은 주일이다. 주일 오후 4시만 되면 부부 네쌍이 만나서 2시간 동안 산책을 하고 맛집 식당을 찾아가서 저녁식사를 한다. 그런 다음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벌써 4년째 되어간다.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담양의 한재골을 산책하고 오리탕을 잘하는 식당으로 갔다. 이 식당은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갈 때마다 손님들로 북적인다. 산책 후 8명이 종종 찾아가는 식당이라 우리는 단골손님이다. 식당의 메인요리인 오리탕도 일품이지만 정성스럽게 차려준 밑반찬도 다 맛있다. 싱싱한 야채를 오리탕에 넣어서 꺼낸 후 들깨 초장에 찍어서 먹으면 정말로 달아난 입맛이 살아난다. 여기에 별미는 솥단지에 해주는 밥이다.
밥도 맛있고 입가심으로 주는 눌은밥도 구수하고 개운하다. 대바구니처럼 생긴, 솥모양 누룽지를 이야기를 하면서 먹으라고 주방에서 주곤 한다.
이 식당을 자주 찾아가는 이유는 전적으로 안사장 때문이다. 늘 미소를 띄우며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 손님들로 하여금 평안함을 안겨준다. 안사장이 큰소리 한번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미소가 말을 대변하듯 늘 웃고 있었다. 안사장과 바깥사장 그리고 주방의 보조 요리사 셋뿐인데 20여 상이 넘는 식당을 척척 운영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안사장님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날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가득 찼는데 바깥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안사장만 동분서주 땀흘리며 숨가쁘게 정신이 없다. “바깥사장님은 어디 가시고 혼자 그렇게 바쁘세요?”라고 물었더니 술 드시고 2층 본가에서 자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안사장 혼자 고생하는 모습에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것이 바깥사장의 까칠한 성격 때문에 욱하는 모습을 식당에서 여럿차례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한심스럽게 자고 있는 바깥사장이 밉게 생각되면서 안사장의 고달픔이 우리 아내들의 고달픔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안사장의 미소가 세상을 초월한 미소가 아니라, 정말로 행복하고 기뻐서 웃는 모습으로 만들어 드릴까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 여자 넷은 쉬은 것부터 시작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안사장한테 최대한 맛있다고 칭찬을 해드렸다. 식당을 나올 때는 안사장을 포옹해 드린다. 그리고 다음에 식당갈 때는 작은 선물이라도 꼭 챙겨가서 안사장한테 드리자고 도원결의했다.
결의를 실행으로 옮긴 날이다. 한재골을 산책하고 식당으로 가는데, 도로가 농원에 복숭아가 탐스럽게 나를 데려가 달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우리는 황도(黃桃) 한 상자를 2만원 주고 샀다. 싱싱하고 맛있게 보여서 우리 네 집도 한 상자씩 샀다. 도원결의 했더니 결국 복숭아 과원에서 복숭아를 사서 들고 가게 되었다.
식당에 들어가자 복숭아 한 상자를 안사장께 안겨 드렸더니 땀 벅벅이 된 얼굴로 활짝 웃는다. 하루 종일 시달렸던 고달픔이 봄눈 녹는 듯 하다고 했다. 안사장은 힘든 것을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우리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듯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진실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눈빛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식당의 안사장과 손님이 아닌 같은 여자로서 마음이 찌릿찌릿 전해졌다.
이 모임에서 한 해에 50번 넘게 식당을 찾아가지만 항상 느낀 것은 바깥사장보다는 안사장님 훨씬 고생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요리도 하고 서빙도 하고 눈코 뜰새없이 바쁜데, 바깥사장은 한량이 많다. 동상이몽이 따로 없다. 이 식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당은 맛도 중요하지만 식당의 분위기도 한몫을 톡톡히 한다. 아무리 소문난 맛집이라도 손님들한테 찌들려서 지친 표정을 짓는 것도 여러번 본 적이 있다. 서빙하는 알바생들이 더 이상 손님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읽을 때도 있었다. 맛집이라고 가보면 시장통인지 전쟁통인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시끄럽고 정신없을 때도 있는데, 그런 곳에서는 단 1초도 머물고 싶지 않다. 음식은 맛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당에 흐르는 분위기가 맛을 좌우하기도 한다. 이 식당은 안사장의 평온한 미소가 손님을 머물게 한다.
복숭아 하나를 씻어서 한 입 베어 물던 바깥사장이 우리 자리로 와서 동석을 했다.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하면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복숭아 2만원의 값어치는 생각보다 컸나보다. 식당 운영하면서 여행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했다며, 열심히 돈은 벌었지만 그렇게 돈이 모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여러 진상 손님들 때문에 속상한 일과 발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식당도 변해야 하기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다보니 몸에 병만 생겼다고 했다. 성격이 급해서 마누라를 힘들게 한 적도 많았다며 복숭아를 먹으면서 우리들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오늘처럼 이런 행복이 있기에 지금까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듣고 보니 바깥사장도 정이 많은데 표현을 안하는 사람 같다.
안사장은 우리 상에 부족한 것이 없는지 계속 오더니 반찬 리필도 풍성하게 해준다. 평소보다 더 싱글싱글 웃으시면서 서빙을 한다. 사람은 마음을 알아주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아주 작은 것에도 감동을 받는다는 것을 안사장의 가벼운 몸짓에서 볼 수 있었다. 늘 손님한테 무엇이든 대접하고 베풀어야 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손님한테서 받은 선물이 크게 느껴졌나보다. 우리 일행이 식당을 나서는데, 왕관처럼 생긴 누룽지를 비닐봉지에 각각 담아서 4개를 주셨다. 각 가정에 하나씩 선물을 해주신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받아서 돌아오게 되었다.
사장 내외분에게 오늘과 같은 날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손님은 왕이 아니다. 음식 만든 수고에 정당한 댓가를 치르고 식사를 하는 대등한 관계이다.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서 준 식당 주인들이 있기에 우리는 돈 주고 맛있게 사 먹을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하다. 잠자리에 들 때 두 분이 두 손 꼭잡고 오늘 일을 흐뭇하게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수고와 노력이 보상받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가 행한 작은 일로 인해 더없이 행복하고 기뻤다. 복숭아 2만원의 행복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만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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