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산 이야기[2]/내 인생의 수필집2

3일만 주어진다면

순수산 2019. 10. 31. 13:30

 

[2019.10.09. 순천만 습지]

 

 

 

“3일 후면 죽습니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는다. 순간 앞이 깜깜해지면서 마주보고 있던 의사의 얼굴이 흐려지며 윤곽이 뭉개진다. 온몸의 기운이 쏜살같이 빠져 나가더니 의자에 앉아 있지만 나는 껍데기 뿐인것 같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된다고 누누이 각인시켜보지만 이미 혼미해진 상태이고 진료실을 어떻게 걸어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나이 쉰 하나에 죽다니. 100세 시대에 이 무슨 억장 무너진 소리인가. 이제 절반밖에 살지 않았는데, 앞으로 여유롭게 살 날만 남았는데, 의사한테 3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통보를 받다니. 분명 내가 잘못 들었을 것이다. 그럴리는 없다. 어제까지 건강하게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정말로 내가 3일 후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순간 지나온 삶이 파노라마가 되어 스쳐 지나간다.

 

어느 날 갑자기 비명횡사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게 남은 3일을 어떻게 보내야 후회없는 마지막이 될까. 일분 일초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다. 평소 계획을 잘 세우고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백지를 앞에 두고 쓴다. 후회없는 생애를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내 마지막을 기록한다.

 

내 인생 사전에 무료함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바쁘게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건만 매일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살인적인 스케줄로 퇴근 후에도 이곳저곳 갈 곳이 많아서 귀가는 늘 늦었다. 이런 나를 이해해 주며 집안일을 잘 도와준 너그러운 남편에게 감사하다. 밖의 일로 바쁜 엄마에게 불평하지 않고 혼자서도 저녁밥을 잘 차려 먹은 자립심 강한 아들에게도 고맙다.

 

내 생애의 3일 중에 첫날은 가족에게 당부하는 날이 될 것 같다. 남편과 아들에게 우리집 가계상황에 대해서 꼼꼼하게 알려준다. 회사에서 회계 일을 담당했기에 편리함을 위해 아파트, 자동차, 통장 등 경제적인 모든 명의가 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제 조모조목 알려주며 명의 변경하도록 해야겠다.

 

보험, 적금, 대출 등 자료를 출력해서 내가 없어도 차질없이 처리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한다. 그리고 쿠쿠밥솥과 세탁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간단한 음식 만들기도 알려줘야겠다. 냉장고에 있는 음식도 꺼내 먹지 못해 내가 없으면 라면만 끓여 먹던 우리집 두 남자들이 어떻게 요리를 잘 해먹을지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남은 가족에게 내 보물 2호 <순수산 가족신문>을 꾸준히 이어서 발간하라고 전할 것이다. 또한 우리 가족의 미미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순수산 가족의 희망이야기>도 계속 유지하도록 유언을 한다. 그동안 가족신문 원고를 써주라고 독촉해도 써주지 않았던 두 남자들이 마지막 나의 부탁인만큼 자원해서 가족신문이든 블로그든 작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장 마음이 걸리는 일은 입원 중인 친정엄마다. 매주 두 번씩 엄마 얼굴을 보러 병원에 찾아가는데, 앞으로 엄마 간호는 남은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잘 보살펴 드리도록 부탁해야겠다. 혹시라도 엄마가 나를 찾으면 ‘큰 딸은 멀리 여행갔다’고 얘기하라고 전하리라.

 

둘째날은 유고집을 발간하도록 이야기 하리라. 그동안 써 놓은 원고를 모아서 내 대신 예쁘게 책을 만들어 달라고 가족한테 말할 것이다. 써 놓은 글이 책 한권 분량이 넘는데 아마도 이 책이 나온다면 유작이 되겠지. 남편과 아들이 뜻을 모아 책을 만들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가족을 사랑했는지 고스란히 전해질 것을 믿는다.

 

마지막 날에는 가족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가을이라 좋다. 휴식처에서 가족과 함께 소풍 온 기분으로 즐겁게 보낼 것이다. 이 땅에서의 내 마지막 날의 기억이 좀 더 즐겁고 기뻤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눈에 많이 담아둘 것이다. 인생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 축복이라면 축복이다. 그동안 이자가 붙은 것도 아닌데 꽁꽁 아껴두고 쓰지 않았던 “사랑해”라는 말을 다 써버리고 갈 것이다.

 

그리하여 내 장례식에는 찬송가가 잔잔하게 들렸으면 좋겠다. 친지들과 친구들에게만 부고를 알려서 조용한 가운데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웃고 있는 내 영정을 보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했던 추억을 맛있게 까먹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죽는다는 것은 천국에 가는 것이니 전혀 슬퍼할 것도 없으며 언제라도 천국에서 다시 만날 우리들이니 내가 먼저 가서 좋은 자리를 잡아놓을 것이다.

 

내 버킷 리스트가 전국 17개 국립공원 산을 등산하는 것인데, 아쉽게 세 곳을 가보지 못했다. 설악산, 태백산, 오대산 정상에 올라가서 꼭 정상석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라고 남편한테 숙제로 남겨 줄 것이다. 부족하고 나이 어린 아내지만 늘 존중해주며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남편에게 말해줄 것이다. 결혼 26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마음 편하게 해줘서 감사하고 존경한다고 남편을 만난 것은 내 인생의 대박사건이며 수지 맞은 인생이었음을 감사하리라.

 

사랑하는 아들의 장성한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아쉽긴 하다. 며느리도 손주도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아들은 아빠의 근면 성실함과 책임감을 닮아서 무엇을 하든 신뢰가 간다. 아들이 열정적이고 긍정적이며 자존감이 높은 것은 순전히 내 기질을 닮아서 그렇다. 아들이 계획한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이뤄낼 것이라 믿는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 한 것은 아들을 낳은 것이며 아들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이었다.

 

막상 죽는다고 하니 담담하고 평안한 마음이다. 열심히 살았기에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더 이상 시간에 쫓길 필요도 없고 무엇을 이뤄야 할 강박관념도 없어서 홀가분하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잘 살았기에 이제는 따뜻하고 뽀송뽀송한 침상에 들어가 잠만 자면 되는 그런 느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끝이 아닐 것이다. 죽음은 축복이고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죽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치유이자 자유다.

 

“형순아, 그동안 살아내느라 수고 많았다. 이제는 새벽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깨어나지 말고 영원히 푹 자렴.” 나를 사랑해주신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듯이 가리라.

 

 

[2019.10.26. 보성 녹차밭]

 

 

 


20년도 전에 유언장을 미리 써보기도 했고, 죽음체험이라며 관속에도 들어가 보기도 했다.  죽음은 삶과 연결되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알게 되었는데, 

<죽음은 자유이며 치유다>라는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만약 내게 마지막 3일만 주어졌다면, 가정하에 막상 써보긴 했는데...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준다. 아둥바둥 살 필요는 없다. 글을 쓸때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래도 막상 쓰고 나니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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