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이라는 느낌은 상큼하고 약간의 긴장과 설레임으로 다가선다. 그도 그럴것이 365일중 첫째날인 오늘은 크나큰 의미를 부여안고 나에게 고스란히 찾아왔다. 새벽 4시에 일어난 일은 난생 처음이다. 저녁같은 새벽에 집을 나서며 며칠전부터 세운 계획이 차질없이 이루어짐에 일말의 뿌듯함이 전해진다. 비록 몸은 잠에서 덜 깨고 물먹은 솜처럼 무겁지만 정신력만큼은 또렷하다.
텁텁한 목소리로 아이는 “엄마 저녁 몇시야?”라며 어두운 차창을 바라보며 평소와 같지 않는 행동에 어리둥절한다. 차는 어둠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린다. 이시간에 해맞이 하러 가는 차량들이 많다.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을 잊고 즐겁고 살맛난 한해로 탈바꿈하고자 만사형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일맥상통할 것이다. 날씨가 궂어 해를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새해 첫날 집이 아닌 자연속에서 아침을 맞이한다는 것이 온몸을 샤워한 듯 정갈함으로 전해질 것이다.
보성 율포해수욕장에 도착한 시간은 7시가 되지 않았다. 긴 행렬로 해맞이 행사차량을 기다리고 있는 뭇사람들의 부지런함을 읽는다. 우린 일단 싱싱한 바닷내음를 맡고 싶어 걸어서 해변으로 갔다. 자잘한 모래가 내 발길을 끌어당기고 까만 하늘에 천연색의 불꽃이 피고지고 서너개의 어선이 정박되어 물살에 이리저리 출렁인다. 그 위에 갈매기는 아침을 맞이하려는 듯 부산하게 활기를 친다. 끼룩끼룩 그들도 우리의 마음을 읽었을까. 어제와 다른 모습에 반가움을 연신 전한다.
언제 어둠이 가고 기다리던 해가 시뻘겋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새벽 찬기운에 몸을 이러저리 움직여야 그나마 추위를 덜 느끼게 되었다. 반가운 님은 오지 않고 점점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어스름 회색빛의 바다는 무디고 담담한 모습뿐이다. 방파제 끝에 있던 몇몇은 그만 집에 돌아가려는지 뒤돌아오고 있다. 그때였다. 너울너울 연한 붉은빛이 점점이 나에게 전해진다. 수평선에서부터 나에게로 신호를 보낸다. 그 물결치듯 전해지는 빛은 간절한 손짓이다. 그러더니 보일락말락 초승달마냥 그려진다. 안개라는 거미줄에 칭칭 걸려 힘들게 떠오르며 주저주저하는 해는 힘겹게 물살을 박차고 오르려는 듯 애달프다. 나는 “해가 보인다.”라며 큰소리로 주위를 환기 시켰다. 기다린 님이 약속을 어기지 않고 찾아준 것이 기뻤다. 내 목소리에 뒤돌아오던 사람들도 반가운 내색을 하며 그렇게 보고자 했던 해를 한동안 감상한다. 주위는 숙연해졌다.
순식간에
해는 달걀 노른자의 노릇노릇한 모습으로 수평선 바로 위에 떠있다. 그 옆에 기러기 두 마리 날아가고 어선 하나 삼각구도를 잡고
동양화를 그린다. 나는
오른쪽 세로줄로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는 글자를 새겨본다. 영락없이 연하장 표지그림이다. 지난해 보다는 좀더 나은 한해를 기약하며 희망찬 소원를
빈다. 누구에게라도
속 시원하게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해에게 고백한 것이다. 아이는 ‘엄마 아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게 해주세요’,‘공부 열심히 해서 플레이션 2를
선물 받게 해주세요’라며 소원을 빌었다한다. 이순간
절절이 전해지는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 염원(念願)이 있어 해에게 전하고자 새벽 먼길을 달려온 것이다. 내
생애 이처럼 진지한 독백이 몇 번이나 이루어질까. 어슴푸레한 새벽을 몇 번이나 마주할 수 있을까. 그동안 나태했던 지난날이 가슴을
짓누른다.
해는 얌전히 내 얘기만을 들어주며 아직 이루지 못한 많은 꿈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하나 이루어 가라고 신신당부한다. 꿈을 간직한 여인이 되어 1년후에 다시 만나 영근 꿈에 감사하고 또다른 꿈을 만들자한다. 오늘 마주한 해는 친구처럼 다정하다.
2004. 1. 1